석벽에 인각된 달마(1)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빨리 갔다. 몇 년이 훌쩍 지나고 소실산(小室山)에도 다시 봄기운이 감돌았다.
추위를 뚫고 초록빛이 산야에 피어 올랐다.
이 날도 새벽부터 달마는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석벽을 마주 보고 앉아서 시공을 넘나들며 현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요즘 들어 달마는 낮에는 땅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밤에는 하늘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기에 이르렀다.
그윽하고 조용한 화룡동굴은 달마에게 있어서 명실공히 운명의 터전이다.
명이 정해졌기에 달마는 이 곳에 머물게 되었지만 앞으로의 운은 그가 하기 나름이다.
달마는 그동안 온갖 풍상을 겪으며 강산을 떠돌아다닌 일조차 깡그리 잊지 않았다.
그는 공(空)한 마음으로 선정에 들었다.
거기에는 날짜나 계절의 개념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달마가 스승 반야다라 존자의 가르침조차 잊은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대승불학이 영원히 창성할 땅인 소림사를 잊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시급한 사안이고 그의 책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달마는 조금도 서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조급함은 이미 떠나 있었다.
그는 단조롭고 조용하게 면벽 좌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세월이 흐르는 것조차 감각 속에서 지워 버린 그런 경지에서 수행에 몰두했다.
오늘 따라 유난히 사방에 고요함이 깃들었다.
새벽바람이 동굴 입구에서 불어와 달마의 살갗을 스쳤다.
차가운 바람 기운이 달마의 감각을 자극했다.
흔히 참선에 접어들면 삼계(三界)를 뛰어넘고 오행(五行)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깊은 선정에 들어 나를 잊을 때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좌선의 초입에서 한기(寒氣)가 사람의 피부를 찌르면 누구나 놀라게 마련이다.
달마도 물론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새벽의 찬바람에 달마의 몸이 약간 떨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달마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달마는 찬바람이 피부에 닿는 순간 봄의 교향악을 들었다.
동굴 밖의 산과 들에서 생명이 움트는 소리가 음악처럼 바람에 실려 속삭였다.
모든 생명체의 기쁨은 그대로 달마의 몸 속에 체각(體覺)되었다.
달마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합장했다.
어느덧 해가 높이 솟으면서 햇빛이 동굴 속으로 스며들었다.
동굴 속은 차츰 온기로 휘감겼다.
동굴 안에 있던 개미 같은 미물들은 비로소 활동을 시작했다.
조그만 미물들의 움직임에서 달마는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
우주가 주천(周天)하는 소리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면벽 좌선으로 고요 속에 빠지면 아무리 작은 소리일지라도 천둥번개 치는 소리로 들리는 법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천둥번개 소리조차도 소리 없음을 깨닫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는 소리가 아니고 소리 아님은 또한 소리인 것이다.
달마는 한낮이 지났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붉은 해가 서산에 지고 달이 동굴 밖 산마루에 걸리기 시작했다.
달마는 그래도 돌부처인양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벌써 달마가 곡기를 끊은 지는 오래였다.
심지어는 동굴 밖의 샘물조차 며칠째 찾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달마에게는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었다.
그의 입 속은 금진옥액(金津玉液)의 달디단 침으로 가득했다.
그 단 침은 하늘기운과 땅기운이 합쳐진 감로수다.
감로수란 흔히 ‘생명의 물’ 또는 ‘법의 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물은 몸 안에서 주천(周天)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만 생긴다.
이 때의 주천이란 사람의 몸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 데서 비롯된 말이다.
주천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마치 우주가 운행하듯 사람 몸에 기의 운행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천이 이루어지면 소우주, 곧 사람 몸이 대우주와 하나가 된다.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법열(法悅)이고 커다란 깨달음이다.
달마는 감로수를 몇 모금씩 숨기운에 버무려서 식도로 넘겼다.
그는 이런 경지가 거듭되면 틀림없이 성불의 예조(豫兆)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지인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지인은 달마가 공양을 사양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한 이 마당에선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혹스러웠다.
물론 지인은 달마 조사의 공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달마의 몸을 잊은 정진에 감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마의 몸이 쇠약해지기라도 하여 쓰러질까 싶어 걱정이 앞섰다.
지인은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늘 안절부절 못 했다.
이 날도 저녁예불을 마친 다음 지인은 달마가 좋아하던 입맛 나는 반찬을 공양간에서 조금 내 와 몰래 석굴로 달려왔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마에게 공양을 들게 할 결심이었다.
지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선 달마가 면벽 좌선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인은 너무 급하게 달려온 나머지 숨을 헐떡였다.
동굴 밖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죽였다.
동굴 앞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달마를 불렀다.
“조사님, 조사님.”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지인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만 울릴 따름이었다.
지인은 깜짝 놀랐다.
혹시 조사님께서 이미 쓰러진 것은 아닐까?
그는 급한 마음으로 동굴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영롱한 달빛이 동굴에 스며들어 석벽이 환하게 눈 속에 들어왔다.
그 곳엔 달마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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